나머지와 남은 것들

Remnants and Remains


2025.5.28 - 6.27

Project 1. 전시후원작가

강지윤

Jiyun Kang



선명한 세계로부터  



무한 스크롤은 다음 내용을 보려고 스크롤 바를 내릴 때마다 새 페이지를 생성한다. 멈춤이 없는 그 기능에 익숙해진 눈은, 그저 부드럽게 이어지는 화면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어느 순간부터 ‘보는’ 일은 걸리는 것 없는 매끄러운 표면 위를 구르는 일이 되었는데,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눈은 지긋이 바라보는 게 서툴고, 한 곳에 머무는 시간도 점점 짧아져 간다. 눈앞의 것을 되새겨 보기도 전에, 가상과 현실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이미지들의 선명한 형체는 생각의 순간조차 밀어낸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선명한 이미지들 속에 살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때로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이며, 배타적인 질서를 보편적인 것처럼 내세워 사람들의 시선을 점유한다.  


자기 게 아닌 그림자도 집어삼키는 과도한 확신 앞에서, 사소하고 불확실하게 읽히는 존재들은 이미지가 되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말없이 누락된다. 강지윤의 작업은 이처럼 이미지 바깥에 머무는 것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백을 다시 바라본다. 그 ‘보기’는, 핸드폰처럼 선명한 해상도를 가진 화면에서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이미지가 아니다. 몸을 움직여야만 하거나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그리고 오래 머물러야만 시야에 포착되는 감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빈 공간을 본다고 하면 대개 아무것도 없는 가장자리, 텅 빈 벽과 바닥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빛바랜 테라조 계단을 따라 내려간 전시장 입구, 벽 한편에서 일렁이는 장면들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빛 속에는 읽을 수 없는 신호가 있다. 다시 몸을 돌려 전시장 가운데로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비행하는 새의 그림자가 비치는 블라인드가 시선을 멈춰 세운다. 


전시장의 기둥 가까이 설치된 2 채널 영상 <나머지와 남은 것들>은 빛이 투과되는 천과 상이 뚜렷하게 맺히는 목재 스크린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상은 한때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았던 파란색이 어떻게 시대의 상징이 되었는지 추적한다. 파란색은 자연이었다가 죽음의 상징이 되며 배척되기도 했다. 이후 정치적인 목적과 맞물리면서 성모의 옷자락을 뒤덮을 수 있는 고귀한 색으로 격상된다. 자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파란 장미는 불가능한 것,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처럼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대변하게 된다. 이처럼 파란색은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거쳐 다양한 기호를 품어왔다. 강렬한 색에 대한 이야기 앞에서 두 화면을 한눈에 보려고 멀찍이 자리를 잡아보지만, 비스듬히 떨어진 한쪽을 응시하려고 하면 다른 쪽은 시야 끝으로 밀려난다. 산만한 주의를 달래는 모빌처럼 일정한 리듬을 반복하는 배경음은 오히려 예민해져야 할 감각을 둥글게 만든다. 그렇게 주의가 느슨해진 틈을 타 작가는 그 어떤 것도 파란색 자체의 속성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조용히 덧붙인다. 어쩌면 그 의미는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실체가 분명하다고 믿었던 것들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말, 시대정신이라 부르던 견고한 이름들조차도 어떤 순간에 목격된 것일 뿐이다. 그것은 현재를 부르는 유일한 이름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파란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았다고 믿는 것’에 대한 것이다. <나머지와 남은 것들>은 우리가 보는 것 그리고 보지 못한 것 사이의 틈을 드러낸다. 나머지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배제하거나, 선택의 논리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들은 우리가 끝까지 바라보지 못한 채 남겨두고 떠나온 감각이다. 강지윤의 작업에서 보는 것에 대한 이 이야기는 힘주어 발음해야 하는 어떤 단단히 고정된 말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 그는 공백을 보는 법, 볼 수 없다고 생각한 무언가가 생략된(그렇게 되었다고 믿는) 자리, 있었던 흔적을 바라보는 경험을 공유한다. 


각각 검고 흰 화면으로 바뀐 스크린 앞에서 눈발이 휘날리는 한 쌍의 장면을 기다린다. 곱씹어도 흐려지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게 하는 조용한 순간이 어색해 주위를 돌아보다가 투명하고 모호한 질문이 시선 끝에 걸렸다면(<투명한 그림자>) 당신의 눈은 오랜만에 무언가를 담아보았을 것이다. 본다는 것은 이렇게 흔적을 머금는 것과 동시에 현실로부터 자기의 시간을 연결해 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어떤 시선은 우리를 생각의 기로로 이끄는 대신 멈추게 한다. 그러니 시선을 일순간 사로잡는 빛이 있다면, 나를 제자리에 굳게 만드는 어떤 머리가 아니라 그 머리를 든 손을 봐야 할 것이다.  


망막 뒤에 상이 맺히는 것처럼 천 스크린을 통과한 영상의 일부가 전시장 벽면에 일렁이다가 어느 순간 소리가 잦아들고 사위가 고요해진다. 1분이라는 암전의 시간, 전시를 위해 작동해야 할 것들이 멈춘 사이 전시장에 공백이 생기면서 새삼스럽게 그림자를 드러내는 것들이 눈길을 끈다. 언젠가 하늘을 비행했던 새가 창문 하나 없는 지하 한구석을 맴돌고, 그 새가 부딪히며 남긴 것인지 모를 끈적한 흔적으로 시선이 모였다가 텅 빈 것처럼 공기가 달라진 전시장을 조용히 바라본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스크린을 마주 보고 앉아 곧 사라질 이 공백의 순간을 눈으로 머금어본다. 전시장의 소란한 움직임과 소리가 잦아들면서 공간에는 전시를 보는 누군가와 전시를 이루고 있던 말해지지 않은 조용한 것들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전시의 움직임이 멈추어도, 전시장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이 될 수 없다. 작품들이 모두 빠져나가도 작품을 지탱하기 위해 박혔던 못의 흔적이나 구멍을 막은 자리, 여러 번 덧칠해서 도드라진 부분은 전시장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그 자리를 오래 바라본, 공간의 기억을 나눠가진 이들의 눈앞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전시장조차 여전히 무언가가 어른거리는 풍경이 된다. 


모호한 말로 이어간 글의 끝에서 선명함이 갖는 다른 이미지를 떠올려 볼 수 있게 되었기를 바라본다. 크로마키처럼 내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 무엇이든 되어야 하는 그래서 사라져야 하는 그 자리가 되었던 경험이 당신에게도 있었을까. 파란색이 되기 위해 지워진 것들로부터 이어지는 생각은 불완전한 인식 체계로 빚어낸 믿음의 영역에 대해 보여준다. 그런 믿음은 언제든 후퇴할 수 있고, 때로는 우리가 후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 시대의 최선인 것처럼 눈앞의 풍경을 이루는 선명한 표본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단지 어떤 순간에 목격된 단편적인 이미지일 뿐이라는 작가의 투명한 메시지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그의 메시지는 질량이 없는 신호로 존재하며, 투명한 그림자를 가진 모습으로 여기 어딘가에서 익명의 수신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물으며 전시장을 부유한다(<Seek You>)†. 누군가에게 닿을 수도 닿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신호에 누가, 언제, 어디서 응답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 신호는 말해지지 않은 말처럼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연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 강지윤은 익명의 수신자들에게 모스 부호 ‘CQ’(-·-· --·-)를 보내지만, 그 신호가 누구에게 닿을지 알 수 없다. 무선 통신에서 불특정한 수신자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 가장 먼저 사용하는 이 호출 코드는, 프랑스어 “C’est que? (거기 누구야?)”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영어권에서는 발음을 따라 “Seek you (당신을 찾는다)”로 해석되었다는 설이 함께 전해진다.






e-c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