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여집합

The Complements of Sphere Arrangements

2018.3.28 - 4.27

Project 1. 전시후원작가

이동근

Donggeun LEE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둥근 모서리.

이것은 직사각의 공간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탐색하고, 더듬어갔을 무언가가 남긴 하얗고 단단한 자취다. 얼추 30센티미터 남짓한 반지름을 지녔을법한 그것은 공간을 가로지르며 남긴 부드러운 호의 모습에서, 마주보는 곡면이 만나 어렴풋이 만들어낸 원형의 실루엣에서, 때론 튜브처럼 길게 이어진 통로의 단면에서 최소한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눈과 몸의 움직임을 부추긴다. 공간을 구획하는 뾰족한 모서리를 향해 무한 회전을 반복하는 구. 그리고 구의 유연한 움직임 속에서 결코 안으로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백색의 공간. 면을 스쳐간 구의 궤적이 남긴 이 여집합의 공간에는 무한과 유한, 가능과 한계, 인식과 미지의 세계가 공존한다.


이동근의 작업은 오늘날 다양한 채널로 열려있는 정보망을 통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시공간을 찾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간접 경험은 주로 인터넷에서 떠도는 피상적인 이미지와 문구, 사건 사고의 제한적 기록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이러한 간접 경험이 지닌 한계, 제한된 정보와 실재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의 격차는 그의 작업에서 작가적 호기심이 작동하고 무한한 상상력이 개입하는 지점이자, 작품 안에서 가상의 내러티브를 구축해나가는 중요한 동인이다. 그는 수집한 정보를 단서삼아, 코트디부아르의 내전 상황에서 죽음을 직면하면서 갈등하는 여인의 심리와(《라다마 그바그보》, 2014) 지구온난화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그린란드 사람들의 일상 속 한 여성의 심리를(《세디낙》, 2015) 단편소설로 풀어내고, 각 소설을 진행하면서 떠올린 감각과 인상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조형적으로 실험해왔다.


그동안 독특한 시공간을 설정하여 구축한 가상의 이야기 구조 안에서,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인상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줬다면, 이번 전시에서 그는 특정 시공간이라는 최소한의 설정만을 남기고, 구체적인 묘사와 서사의 덧댐 없이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반복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에서 발견한 인간의 보편적 인식과 욕망의 문제를 몸의 움직임과 눈의 감각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 안에 제시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우주정거장(International Space Station, ISS)을 소재로 냉혹한 환경 속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주인의 삶에 주목한다. 그는 생존을 위협하는 변수와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상의 예행연습을 무한 반복하는 우주인의 모습에서 불명확한 대상을 파악하기 위한 인간의 강한 의지와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한계를 확인하고, 이를 구의 형태와 움직임, 공간과의 상호작용, 물리적 경계면을 통해 은유적으로 전달한다. 즉, 구가 네모난 공간을 회전하면서 움직일 때, 두 대상 간의 근본적인 형태 차이로 인해 생기는 자연스러운 여백을 여집합의 공간으로 상정하고,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단단하게 자리한 모서리의 경계면에서 미답의 영역을 향한 인간의 의지와 욕망, 그것의 한계, 정의내릴 수 없는 세계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물질을 통한 직접적인 경험과 감각의 문제에 보다 집중하는 것은 제한된 정보와 이미지의 지시적 연결 관계가 지녔던 한계점과 내러티브의 구조와의 강한 결속 안에서 머물렀던 조형성을 보다 자유롭고 근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동근의 작업은 경험과 인식의 한계 너머에, 언어를 통해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대상을 향해 있다. 시각언어를 통해 그것을 경험의 영역으로 소환하는 일은 대상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 두려움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감내해야 할 수많은 시행착오의 불편함을 요하는 지난한 여정이다. 이제 막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작가에게 작업은 그의 소설 속 한 구절처럼 ‘불안함을 주는 그 너머의 그 무언가에 대한 냉소적 자학행위’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생존을 위한 예행연습을 쉬지 않고 반복하는 우주인의 강한 의지’를 실천하면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삶을 지켜나가는 분명한 이유인 듯하다.


‘내가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나를 생각하기 이전에 궁극의 나에게로 돌아가는 듯한 시간. 아니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돌지만, 같은 곳이 아닌 것 같은 착각 속에 무한히 반복하는 회전운동. 뭐라 비유하기 힘들지만, 행동을 통해 그 행위가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함을 느낀다.’

- 이동근의 2014년 단편소설 《라다마 그바그보》 중에서.




황정인(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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