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향

B1Hyang

2020.3.25 - 2020.4.24 

Project 1. 전시후원작가

이진형

LEE Jin Hyung

기척 없이 다가와 시야를 전복하는 것이 있다―온도가 바꾸는 계절의 냄새, 피부에 닿는 햇빛과 바람의 온도, 밤이 색을 지워버리자 드러나는 형태, 그런 것들이 환기시키는 기억, 그리고 멀어진 시간의 거리만큼 낯설어진 장소와 물건들. 세상은 분명한 것보다 모호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텅 빈 사루비아의 전시장에서, 작가는 공간이 가득 차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어떤 향을 감지한다. 《비원향》은 우리가 알고 있던 대상의 맥락을 뒤틀어 생경하게 드러내고 회화적 물성으로 실현하려는 작가의 시도를 수반한다.


이진형은 사진, 영화 등의 시각 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무작위로 수집한다. ‘수집된 이미지에는 그것을 수집한 사람의 의도와 취향이 묻어있다.’*. 선택된 이미지는 그것이 지시하던 대상이 연상되지 않을 때까지 가공되거나 일부만을 남긴 채 지워지고, 그 과정에서 포착된 색감과 형태는 캔버스로 옮겨진다. 캔버스로 옮겨진 이미지는 작가의 감각과 물감을 덧입으며 개별적인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진형의 작업은 대부분 구상적인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는 명확한 서사를 통해 그것을 전달하기보다는 모호하고 생경한 형태로, 회화의 물성을 통해 드러내는 것을 택한다. 하나의 의미가 이미지를 단정 지어버리는 것을 막고 관람하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경험과 해석을 가져갈 수 있도록, 직접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기보다는 최대한 심상이 머금은 공기와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수집된 이미지와 형태는 작가의 감각을 환기하는 촉매이고, 화면 위에 전사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추출되고 축적된 후 다듬어진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진형은 그림을 이해시키는 것보다 그것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는 장면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공기처럼 부유하던 감각을 회화적인 물성으로 (얇고 투명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깊은 회화로) 물질화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서 이진형의 작업은 무엇을 그린다기보다는 어떻게 그리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사유는 형상을 빚어내듯 떠오른다. 흩어져있던 심상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정적이 선명해지는 순간을 찾을 때까지, 작가는 이미지를 다듬고 섬세한 선이나 자국을 더하며 신중하게 밸런스를 맞춰나간다. 일련의 작업들도 한정된 방법에 머무르지 않고 톤, 크기, 농도, 미디엄 등을 다양하게 실험하며 전개된다. 작가는 화면을 구성할 때 그림과 그림 사이의 연결성을 고려하면서 작업을 진행해나간다. 하지만 이는 장면으로써 그림을 잇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회화의 물성을 실험하고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표면들 사이에 접점이 생기고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농도와 기법을 연구하며 다른 갈래로 뻗어 나가는 것 같았던 그림들은 작가가 작업을 어떻게 전시할지, 어떻게 함께 놓을지를 염두에 두는 과정에서 다시 한 덩어리로 뭉쳐진다.


이진형 회화의 물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지만, 주로 수채화처럼 표면 위에 잔잔하게 스며든 형태나 잔여물 없이 매끈하게 처리된 표면을 통해 드러난다. 작가는 브러시스트로크(brush-strokes)처럼 손에 의한 기법을 좀 더 다양하고 유연하게 구사하고자 지지체(painting supports)와 바닥칠(grounds and primer)의 연구를 겸행한다. 회화의 표면에는 습관과 스타일에 의해 이루어지는 형태 묘사, 물감의 농도, 브러시스트로크가 있고, 기교와는 별개로 그림의 토대가 되는 원단, 종이, 나무 등의 지지체, 그리고 안료를 고정시키기 위한 바닥칠로 이뤄져 있다. 작가의 연구는 캔버스 틀은 변형하거나 해체하기보다는, 기본 형태인 직사각형을 유지하되 원단과 바닥칠의 쓰임을 다양하게 하여 얇지만 깊이 있는 표면을 구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캔버스의 통일된 형태는 지지체의 쓰임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물을 부각시킨다.


작업이 전시장으로 들어올 때, 작가는 다시 한번 균형을 생각하게 된다. 공간은 새로운 화면이 되고 이미지들은 그 안에서 다시 배치된다. 형체도 없이 시야를 전복시킨 지하의 향처럼, 때로는 정립되지 않는 것이 더 명확할 때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떤 것들도 한때는 미지의 존재였다. 작가는 대상의 형태를 빌리거나 맥락을 가진 이미지로써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생명력을 얻어 스스로 말을 건네기를 바란다고 했다. 《비원향》을 통해 회화를 은유가 아닌 독자적인 개체로 선보이고, 의미를 열어놓은 낯선 존재로써 다양한 해석이 공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문소영|사루비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작가노트(2019)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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